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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 독후감

박풍규 2013. 9. 3. 17:48

간송 전형필 독후감)

 

박풍규(청주대학교)

 

 

Ⅰ. 글머리

 

우연찮게 알게된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선생의 전기를 읽었다. 모처럼 훌륭한 인물의 일대기를 접하게 되어 뜻하지 않게 감동을 맛보았고 그처럼 멋진 부자가 우리한테도 있다는 사실이 새삼 기뻤다.

알려진 대로 선생은 거부 집안에 태어나 젊어서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부자의 몸으로 일제강점기를 살면서 해외로 팔려나가고 무지로 인해 멸실되는 민족문화유산을 수집하여 사재로 지은 박물관에다 소장해서 지킨 훌륭한 애국자이시다.

만일 나에게 엄청난 돈과 재산이 갑자기 생긴다면 어떤 일을 과연 할 것인가? 돈 때문에 부인하고 매일 튀격퇴격 하던 것을 청산할 수도 있고, 세계여행을 가고 좋은 차를 구입하고, 주위의 도움을 바라는 친척에게 얼마씩 주기도하고, 그동안 돈이 없어 못해본 취미생활도 하여보고, 유흥을 위하여 쓰거나 고급 옷과 고급주택을 구입하기도하고, 명품 골프채를 들고 날마다 골프도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여본다.

물론 나에게 주어진 권리이긴 하지만 복지시설에 기부하거나 문화예술을 진흥하는 데 쓰면 더 값어치가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조선의 대 갑부였지만 모든 재산과 젊음을 문화재 수집에 바친 간송 전형필의 삶은 우리에게 큰 감동과 울림으로 다가온다.

 

Ⅱ. 전형필의 문화재 수집 및 생애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은 조국이 언제 독립될지도 모르는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얼과 혼을 지키고자 열정을 쏟아 부은 뜻있는 선각자였다.

그는 나이 스물네 살 때 생부와 양부로부터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백만장자로서 유유자적 편안하게 사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억만금 재산과 젊음의 정열을 바쳐 하마터면 일본으로 유출되어 영영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귀중한 우리 조상의 혼이 담긴 서화, 도자기, 불상, 석조물, 서적들을 차근차근 수집해서 이 땅에 남겼다.

  전형필은 스물넷에 ‘조선 거부(巨富) 40명’에 들 정도로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다. 이 정도면 편안히 유유자적한 삶을 즐길 수 있었지만, 그는 젊음과 재산을 다 바쳐 아무도 가지 않은, 우리의 문화재를 지키고 보존하고자 하는 외롭고 고단한 길을 자청했다.

  전형필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휘문보고의 미술교사였던 고희승이었다. 그는 전형필에게 조선의 문화를 지키는 선비가 되어 줄 것을 부탁했다. 선조들이 남긴 귀중한 서화와 전적(典籍)들이 왜놈들 손에 넘어가지 않게 지키는 선비가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외사촌 형인 박종화의 소개로 만난 오세창은 서화를 모으는 일은 재물도 있어야 하고, 안목도 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내와 지극한 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 큰 스승이었다.

  전형필은 오세창에게 조선 땅에 꼭 남아야 할 서화 전적과 골동품을 지키는 데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겠다는 결심을 밝힌다. 서화 전적과 골동은 조선의 자존심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이런 전형필에게 오세창은 자신이 직접 엮은 화첩인 <근역화휘>, <근역서화장>, <근역서휘>, <근역화휘>를 주면서 문화재 수집에 참고하라고 한다.

1933년부터는 성북동에 큰 돈을 들여 문화재를 수장하고자 박물관(지금의 간송미술관)을 짓기 시작한다. 좋은 그림, 좋은 글씨, 좋은 도자기, 좋은 책을 각각 100점씩 박물관에 모으겠다는 꿈. 그래야 박물관을 통해 선조들이 남긴 문화의 궤적을 제대로 이해하고, 동포들에게 우리 민족의 위치가 지금 이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런 결심을 실행에 옮기게 된 것은 오래지 않아 조선이 독립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전형필은 일본에 거주하면서 20년 동안 명품만 골라 수집해 온 영국 출신 변호사 개스비와 기와집 400채에 해당하는 승부를 벌여 일본에 반출된 문화재 20점을 되찾아 온다. 기와집 400채면, 요즘 서울 시내 아파트 최소 시세로 계산해도 1,200억원. 한 점에 60억원이다. 전형필은 이를 위해 선조 때부터 내려오던 공주의 논 1만 마지기를 내놓았다. 문화재 구입을 위해 논 1만 마지기를 내놓는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큰 결단이었다.

  간송이 유산으로 물려받은 전답을 팔아가며 구입한 작품가액은 어마어마한 액수다. ‘청자상감 천학문매병’은 지금 돈 60억원에, 혜원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은 90억원이 들었다.

  전형필은 자신의 취향보다는 그것이 이 땅에 꼭 남아야 할지, 아니면 포기해도 좋을지를 먼저 생각했다. 그래서 숙고는 하지만 장고(長考)는 하지 않았다. 때문에 보존할 가치가 있는 문화재가 나타났을 때 놓친 적이 거의 없었다. 재력이라는 바탕에 안목과 열정이 한데 빚어진 결과이다.

  1938년 9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박물관인 보화각이 준공된다. 이 때부터 전형필은 종로 4가 집에 있던 수장품을 보화각으로 옮겨 진열했다.

  1945년 해방의 기쁨도 잠시 6․25전쟁으로 그동안 모아온 많은 문화재가 산산이 흩어졌다. 설상가상으로 그동안 지원해 온 보성중고등학교에 엄청난 재정사고가 발생했다. 교장이 서무 관리를 소홀히 해 재단이 엄청난 빚을 진 것이다. 이때부터 전형필은 그 빚을 갚기 위해 노심초사했고, 가족들까지 극심한 쪼들림에 시달려야 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재단 빚을 다 갚은 전형필은 급성 신우염으로 쓰러졌고, 1962년 1월 26일, 5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Ⅱ. 전형필이 수집한 가치있는 문화재

 

1. 신윤복의 <미인도>

2008년에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바람의 화원>을 기억하시나요? 저는 바람의 화원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유명한 신윤복의 그림이 매우 인상적이었는데요. 그 작품이 바로 간송 전형필 선생께서 지켜내신 대표적인 우리의 문화재인 신윤복의 <미인도>입니다. 

 

2. 청화백자 양각진사철재 난국초충문병

간송이 <청화백자 양각진사철재 난국초충문병>을 구입하게 된 경위는 참 재미있다. 처음 그 병은 경기도 팔당에서 낚시로 생계를 꾸려가는 할아버지가 참기름병으로 썼던 것이었다. 개성댁 할머니는 이것을 골동품상을 하는 일본인 무라노에게 보였고, 참기름 값으로 4원을 불렀고 병 값으로는 1원을 더 쳐서 5원을 받았다.

며칠 후, 무라노는 이 백자를 다른 골동품상에게 60원을 받고 넘겼고, 얼마 후 그 백자가 스미이 다쓰오라는 수집가에게 600원에 팔렸으며, 스미이는 이 백자를 계속 가지고 있다가 1932년 일본으로 귀국하기 얼마 전에 자신의 수장품 180점을 경성 구락부 경매에 출품하면서 함께 내놨고, 그 경매에서 모리 고이치라는 수집가에게 3천원에 낙찰되었다.

이 백자를 간송의 대리인인 신보에 의해 경매에서 1만 5천 원에 낙찰 받은 것이다. 이 도자기는 광복 후 보물 제241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294호로 재지정되었으며, 지금 간송미술관에 수장되어 있다고 한다.

 

3.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 제68호)

이 아름다운 고려청자는 선생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애를 썼던 문화재입니다. 이 청자는 원래 전문 도굴꾼에게 도굴되어 일본인 흥정꾼에게 넘어갔었습니다. 이를 구매하려는 전형필 선생에게 흥정꾼은 원래 1천 원에 사들인 것을 터무니없는 가격인 2만 원을 제시합니다. (당시 1천 원이면 서울의 번듯한 기와집 한 채를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선생은 단 한 번의 흥정 없이 바로 기와집 스무 채 값을 내고 이 청자를 구입하였다고 합니다. 

후에 또 다른 일본인 수집가가 4만 원을 제시하며 이 청자를 사려 하지만 선생은 정중히 거절했기에 이 아름다운 고려청자가 우리나라에 남아 그 아름다움을 칭송받게 됩니다.

 

4. 훈민정음의 원본인 훈민정음 해례본

일제시대에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되어 어느 누구의 손에 넘어갈지 모르던 상황에서 선생이 압도적으로 높은 가격을 제시하며 구매합니다. 이 훈민정음은 6.25전쟁이 일어나던 때에 선생의 품에 항상 있었고 심지어 잘 때까지도 배게 밑에 보관했을 정도로 선생이 지극히 아껴 보관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선생의 노력으로 훈민정음의 원본이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5. 기타 문화재

이 외에도 선생이 지켜낸 우리의 문화재는 정말 많습니다. 선생이 지켜낸 문화재는 그 양뿐만 아니라 탁월한 컬렉터로서의 안목으로 찾아낸 귀중한 문화재이기도 합니다. 그가 지켜낸 문화재들은 국보 12점, 보물 10점으로 국가지정문화재가 되었답니다. 수많은 문화재를 모은 간송 전형필 선생은 이 문화재들을 모을 공간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그래서 1938년, 서울 성북동에 터를 구해 '보화각'이라 이름 붙이고 수집 작품들을 보관해 오다가 1966년, 선생의 후손들이 '간송미술관' 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간송미술관'입니다. 간송미술관은 1971년부터 매년 봄, 가을 1년에 2회 전시회를 개최해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습니다.

 

Ⅳ. 맺는글

 

<명품의 탄생>의 저자 이광표는 “예술작품은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예술가의 손에서, 또 한 번은 그것을 느끼고 향유하는 사람, 즉 감상자나 컬렉터에 의해 다시 태어난다.”라고 했다. 작품을 소장하는 것은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취미가 아니다. 작품 속에 배어있는 예술가의 혼과 정신세계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감상하기 위함이다. 간송 전형필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더 나아가 우리 문화유산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끼며, 선조들의 얼과 혼을 기리고자 모든 것을 바친 진정한 대한민국의 국민이었다. 그가 있었기에 일본으로 반출될 뻔하거나 반출됐던 수많은 귀중한 우리의 문화재가 제자리를 지키거나 온전히 우리 품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됐다. 간송 전형필의 위대한 삶에 새삼 감사와 존경을 표한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문화유산을 고루 수집했던가는 그의 전기를 읽고 박물관을 관람하면 될 일이지만 그의 인격과 열정, 예술 사랑으로 승화된 나라사랑이 어떠했던가는 귀감삼아 사숙 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내가 그의 신념과 포부에 감탄하고 실천하여 산 일생에 감동하여 경의를 표하는 까닭은 그가 멋진 대장부로 민족문화유산의 사랑이라는 깃발이 휘날리는 위대한 일을 일관되게 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한참 혈기 방자한 나이에 조상이 쌓은 공덕으로 자손이 받는 복이라는 막대한 재산을 받았다.

그가 청년이었던 때는 망국의 한 때문이든 개화시대의 변화에 편승하여 부잣집 자제들이 허랑방탕하게 돈을 물 쓰듯 하며 살던 시절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그 역시 안일과 쾌락을 좇으며 떵떵거리고 살 수 있었다. 또한 아무나 할 수 없는 동경유학을 가서 일류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므로 당시 권좌에 오르는 지름길인 변호사로서 출세를 할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부의 은 스푼을 물고 태어났고 출세가도는 훤하게 열려 있어 마음만 먹으면 일생을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야망이나 욕망을 품지 않았다. 대신에 옛 것을 좋아하는 선각자였다. 돈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따위의 말은 그와 무관했다. 그의 일생에는 이것저것 쓸데없는 생각을 하거나, 하는 일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오로지 민족문화유산을 사모아 지키는 일에 일관되게 종사했다.

이 땅에 옛 풍류나 아치를 좋아하는 호고가(好古家)가 수없이 많으나 단순한 호고가가 아니라 그처럼 거대한 전 재산을 바쳐 민족문화유산의 지킴이로 평생을 산 사람은 없다.

이제 와서 저 때의 정황을 돌이켜만 보아도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가 지키지 않았던들 얼마나 많은 진귀한 유물들이 혹은 나라 밖 으로 팔려나가고 혹은 보존이 부실하여 망가졌을 것이며 혹은 무지로 인해 불쏘시개로 멸실되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저 멋진 부자청년 한 사람의 의로운 인생관이 대군이나 힘센 기라성들도 해내지 못한 위대한 역사(役事)를 달성하여 민족문화를 지켰든 것이다.

그이야말로 온몸으로 나라사랑과 예술 사랑을 실천한 애국자요 예술가였으니 그의 탄생은 우리나라한테 복이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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