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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에르 부르디외의 저서 〔구별짓기〕상권의 “1부 취향에 대한 사회적 비판”을 요약한 후 그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시오.

박풍규 2012. 11. 14. 14:58

삐에르 부르디외의 저서 〔구별짓기〕상권(새물결, 2005)의 “1부 취향에 대한 사회적 비판”을 요약한 후 그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시오.“

 

 

Ⅰ. 글머리

 

사람은 각자 취향이 다르다. 고고한 클래식을 즐기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우리 한민족의 정서가 내제된 트롯트를 좋아하는 부류도 있다. 모짜르트 음악을 즐겨 들을 수 있고, 소녀시대의 노래를 즐겨 들을 수도 있다. 장르별로 고른다면 트로트, 클래식, 발라드, 힙합 중에 무엇을 더 선호하는 음악이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음악 외에 가수의 외모가 더 좋아 음악을 사랑하는 경우도 있다. 청소년들에게 클래식음반과 아이돌 스타의 음반을 2개 놓고 좋아하는 곡을 선택하라고 하면 대다수 아이돌 스타의 노래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구별짓기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문화와 취향을 통해 무언가를 구별짓고자 하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구별 짓고자 하는 것은 곧 계급으로, 그의 이론은 갈등주의 패러다임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별짓기는 현대 인문사회과학의 큰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프랑스 사회사상의 한 부분을 지탱하고 있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가장 대표적인 저작중 하나이다.

이 책에서는 학력자본, 상징 자본, 사회관계 자본으로 구분해 각 계층별로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차별적으로 소비되는 현 사회를 비판한다. 그리고 문화를 통한 실천 특히 예술작품의 수용형태가 취향의 차별화 계기가 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특히 1편에서의 '취향에 대한 사회적 비판'은 방법론적 비판과 새로운 방법론에 대한 모색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부르디외는 '아비투스, 장, 문화자본, 사회자본' 등 그의 사회사상의 독창적인 개념들을 통해 사회공간속에서 각 계급들이 어떻게 구별화하고 차별화되는가를 말하려고 하고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음식과 음악, 의복 등 일상적인 삶 속의 개인의 취향과 기호가 어떻게 구별화, 차별화되고 또 재생산되는가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왜 트롯트를 좋아하는가, 당신은 왜 재즈를 좋아하는가, 당신은 왜 클래식을 즐겨 듣는가에 대한 각자의 취향을 부르디외는 사회공간속에서 계급들 간의 구별화, 차별화전략과 효과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에서 취향에 대한 사회적 비판을 요약하여보고 그가 주장하는 것은 무엇이고 이러한 주장을 통하여 무엇을 나타내려하였는지를 논의, 분석, 비판하여 보기로 하자

 

 

Ⅱ. 내용요약

 

제1부 취향에 대한 사회적 비판을 문화귀족의 칭호와 문화귀족의 혈통으로 구분하여 요약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 문화귀족의 칭호

여러 가지 이러저러한 ‘종속 변수’와 교육수준이나 출신계급과 같은 변수들 간의 현상적 관계 대신에, ‘명확하게 규정된 개념들 간의 엄밀한 관계’ 즉 통계적 관계는 무조건 기록하는 여러 가지 효과의 합리적 원칙을 확립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교육체계에 의해 부여되는 귀족 칭호나 치욕적인 낙인칭호는 각 칭호가 함축하고 있는 실천 간의 관계나 또는 정통적인 예술작품을 통해 획득하는 성향을 의식하건 그렇지 않건 교묘하게 학교에서 교육받게 되는 성향 간의 관계라고 생각하고 중요시 생각하는 것이다.

1) 칭호의 효과

문화자본이 계승되고 교육체계가 기능하는 논리를 통해 가족으로부터 상속된 문화자본과 학력자본 간의 관계를 파악한다면 음악이나 회화 분야에서의 능력은 학력자본과 연관성이 있으며, 실제로는 가족을 통한 문화계승과 학교에 의한 문화계승이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나타나는 결과이다. 무엇보다 먼저 교육체계의 여러 효과 중 가장 은폐되어 있는 효과 즉 ‘칭호’ 부여를 통해 나타나는 효과를 고려해야 한다. 칭호는 긍정적이든(귀족화) 아니면 부정적이든(오명을 찍는 일) 신분을 가르는 특수한 방식 중의 하나로, 모든 집단은 각 개인에게 위계상의 특정한 계급을 지정한다.

교육제도상으로 공인되지 않은 문화자본의 보유자들은 항상 능력을 입증하라는 요구를 받는 반면, 문화귀족의 칭호를 보유한 사람들의 경우,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을 보여주면 그만이다. 귀족들은 본질주의자들이다. 

2) 미적 성향

모든 정통적인 작품은 자체에 고유한 지각 규범을 강제하는 경향이 있으며, 암묵적으로 특정한 성향과 능력을 활용하는 지각방식을 유일한 정통적인 지각방식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이를 통해 예술적 정통성을 승인하는 토대가 되는 환상 속으로 빠져 들어가서는 안된다. 그 대신 모든 행위자들이 객관적으로 그러한 규범에 의해 평가되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와 동시에 예술작품과의 관계를 카리스마적으로 설명하는 이데올로기가 주장하듯이, 이러한 성향과 능력이 자연의 선물인지 아니면 학습의 결과인지를 결정하고, 예술적 능력을 계급별로 상이하게 해주는 경이로운 사건이 일어나도록 해주는 조건의 이면을 조명할 수 있어야 한다.

미적 성향, 즉 사회적으로 예술작품으로 규정되며, 따라서 예술작품으로 인식하고 구성할 수 있는 미적 의도를 갖고 접근하도록 요구하는 대상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하게 ‘적절한’방법으로 사회적으로 공인되는 방법에 대한 본질주의적 분석은 모두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자연적이건 인공적이건 모든 대상이 미학적으로 지각될 수 있다면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은 바로 미학적 의도이며, 또는 소쉬르의 공식을 조금 바꿔 말하자면, 미학적 대상을 창조하는 것은 바로 미학적 관점이라는 결론이 되어버리는 고약한 순환 고리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파노프스키는 예술작품에 스콜라철학적인 의미의 ‘의도’라는 개념을 부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의도’ 자체가 이미 사회적 규범과 관습의 산물로, 이 양자가 결합해 항상 불안정하고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기술적 대상과 예술적 대상의 경계선을 규정한다.

오늘날 미적 지각 양식은 ‘순수한’ 형식을 획득했지만, 이 형식 자체가 이미 예술 생산양식의 특정한 상태에 조응하고 있다.  기능에 대한 형식의 절대적 우위, 즉 재현되는 대상에 대한 재현양식의 절대적 우위를 주장하는 예술적 의도에서 생겨난 예술, 예를 들어 인상파 이후의 회화들은 이전의 예술이 조건적으로만 요구했던 순수 미적 성향을 정언적으로 요구한다.

3) 순수 취향과 ‘야만적’ 취향

소박한 시선을 묘사하지 않으면서 순수한 시선을 묘사하는 것이 결코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두 시선은 상대방과 비교해 스스로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대립적인 시선을 중립적으로, 즉 불편부당하고 ‘순수하게’ 묘사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미학적 상대주의에 동의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왜냐하면 ‘대중미학’은 ‘고급미학’과의 관련 속에서 규정되고, 정통적인 예술에 대한 참조와 ‘대중적’취향에 대한 부정적 판단은 단 한 번도 미에 관한 대중들의 경험에 영향을 미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중 미학은 학문적 미학에 대한 거부인가 아니면 단순한 학문적 미학의 결여일 뿐인가? 둘 다 위험한 유혹이다.

4) 대중미학

‘대중 미학’이 고급 미학의 출발점이 되는 부정에 대한 부정, 다시 말해 일반적 성향과 진정 미적인 성향의 명확한 분리에 기반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이것은 고급문화의 성스러움, 즉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동시에 다른 것을 분리시켜버리는 성격을 드러내는 여러 장치의 일부일 뿐이다.

그러나 민중계급의 청중들은 희미하게나마 예술뿐만 아니라 삶에서 보이는 과시적인 형식성안에 함축되어 있는 것, 즉 표현력이 아주 풍부한 대중적 언어의 다양한 표현 속에서 작렬하는 표현적 내용에 대한 일종의 검열, 또는 같은 얘기지만, 모든 형식적 탐구의 계산된 냉정함 안에 내재해 있는 거리두기 효과, 즉 자신이 전달하고 있는 내용을 재회수하고 거부하는 예술뿐만 아니라 철저한 형식주의를 통해 영원히 친밀함의 유혹을 떨쳐버리려는 부르주아적 예의범절에서도 의사소통 자체의 핵심 안에 의사소통을 거부하는 태도가 은폐되어 있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대중적 오락물은 관객들이 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며, 그 기회를 이용하여 축제적인 분위기에 집단적으로 끼어들 수 있도록 해준다. 만약 서커스나 멜로드라마가 무용이나 연극보다 더 ‘대중적인’이유는 단지 덜 형식화되고, 따라서 덜 완곡하게 표현되기에 한층 더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만족감을 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은 동시에 집단 축제적인 분위기를 불러일으키고 화려한 구경거리를 제공함으로써 모든 형태의 코믹물, 특히 ‘위대한 사람들’을 풍자하고 패러디함으로써 희극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 모든 형태의 희극들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만족감을 주며, 다시 이것이 사회 세계를 전복시키고 실천과 예의범절을 뒤집어버림으로써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5) 미적 이화효과

이러한 대중적 반응은 심미주의자의 초연함과는 정반대이다. 정통적인 작품의 정통적인 소비에 의해 객관적으로 요구되는 성향, 즉 이미 미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대상을 미적인 관점으로 소화할 수 있는 소질이나, 일상적이고 ‘시시한’ 대상을 미적인 대상으로 구성하거나 혹은 예를 들어 요리나 의상 아니면 장식과 같은 일상생활의 극히 일상적인 선택에서 ‘순수’미학의 원리를 적용할 수 있는 아주 희귀한 능력만큼, 다양한 계급을 엄밀하게 구분해주는 것도 없다.

6) 반-칸트적 미학

대중미학의 논리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하자마자 이것이 칸트 미학의 부정적 반대처럼 보이고, 대중의 에토스는 암묵적으로 <미의 분석학>의 각 명제에 대해 그것을 부인하는 반명제를 맞세우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칸트는 명상의 진정 미학적인 특징을 보장해 주는 유일한 특징인 ‘무사무욕’과 ‘쾌적한 것’을 규정하는 ‘감각적 관심’ 그리고 ‘선’을 규정하는 ‘이성의 관심’을 확실하게 분리시키려고 노력했다.

이와 반대로 단순히 기호의 기능에 그치더라도 모든 이미지가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길 기대하는 민중계급은 흔히 아주 분명하게 모든 판단을 내리려 한다.

대중의 의식에는, 칸트적 용어를 인용하자면 감각적 즐거움과 거리가 먼 미학적 쾌락보다 더 이질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즐거움에 대한 매력이나 감동이라는 요소를 추가적으로 요구하는 취향은, 이것을 그러한 취향의 척도로 적용하려는 태도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아직도 야만주의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는 칸트의 말은 정확히 이러한 대중적 취향을 가리키고 있는 셈이다.

7) 미학, 윤리학, 유미주의

예술의 대상들이 삶의 대상들로 체계적으로 ‘환원’되며, ‘인간적’내용을 위해 형식을 괄호 안에 넣어버리게 되는 것은, 순수 미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야말로 진짜 야만주의가 된다.

미적 성향이 생활양식의 토대가 되는 경우 반드시 함축될 수밖에 없는 윤리적 무관심은 실제로는 예술가들에 대한 윤리적 거부감의 뿌리가 되는데, 이러한 태도는 특히 부르주아지 중 몰락하고 있는 분파나 존재 자체를 위협받고 있는 분파들에서 격렬하게 나타난다.

8) 중성화와 가능성의 세계

예술작품에 대한 미적 지각 방법은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획득되는 상관성의 원리를 갖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조차도 ‘전형적인 작품’의 양식적 특성을 규정하는 타당성의 기준은 일반적으로 함축되어 있으며, 예술작품을 구분하고, 분류하고, 체계화하기 위해 함축적으로 동원되는 미학적 분류법은 결코 미학이론이 부여하려고 하는 엄밀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화적 암시와 유비의 유희는 끊임없이 다른 유비관계를 가리킨다. 이리하여 각 체험은 다른 모든 부분적 체험에 응답하고 서로를 강화하는 가운데 예술적 성찰의 매력을 창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프루스트가 말하는 우상숭배의 원천이 된다.

9) 필요로부터의 거리

학력자본과 ‘내용과 무관하게’작품을 향유하려는 성향이나 열망,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정통적인 작품에 의해 요구되는 ‘무목적적이며’ ‘무사욕적인’ 자기투입적 성향 간의 상관관계를 해명하려면 학교에서의 학습이 미적체험을 표현하고, 표현되는 바를 통해 스스로를 구성할 수 있는 언어적 도구와 참조체계를 마련해준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가정이나 학교의 교육활동은 심지어는 극히 예술적인 차원에서 진행될 때도 반드시 경제적, 사회적 조건을 통해 진행되는데, 이러한 조건은 교육을 통해 주입되는 내용 못지않게 교육의 전제조건을 이룬다. 경제력은 무엇보다 먼저 경제적 필요를 멀리 떨어뜨려놓을 수 있는 힘이다.

필요와 그 필요 안에 갖혀있는 사람들로부터 객관적 거리두기는 자유를 과시함으로써 자유로움을 배가시키는 의식적 거리두기를 동반한다. 필요로부터의 객관적 거리가 늘어날수록 생활양식은 점점 더 베버가 말한 소위 ‘삶의 양식화’로 이어져 포도주나 치즈의 선택, 또는 실내 장식 등 극히 다양한 실천의 방향을 지시하고 조직하는 체계적 방침의 산물이 된다. 이처럼 필요를 통제함으로써 얻게 되는 힘의 적극적인 위력은, 항상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치품이나 과시적인 소비에 드는 임시 지출비를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없기 때문에 일상적인 이해관심이나 절박한 요구에 지배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한 정통성의 측면에서 우월성을 요구한다. 이러한 자유 취향은 필요 취향과 관련해서만 관철될 수 있으며, 따라서 이 필요 취향은 미적인 영역과 관계되어서는 속물적인 것이라고 규정된다.

이리하여 극히 정교한 ‘등급분류’를 통해 행사되는 특권이 가장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는 특권을 누리기도 한다.

10) 구분감각으로서의 미적 감각

특수한 생활조건과 관련된 조건의 산물인 미적 성향은 동일한 조건의 산물인 모든 사람들은 함께 묶어주는 반면 그 밖의 다른 사람들과는 구분시켜 준다.

취향은 피할 수 없는 차이의 실제적인 확정이다. 따라서 취향이 정당화될 때 순전히 부정적으로, 즉 다른 취향들에 대한 거부의 형태로 확인되게 된다. 그것은 취미가 자연(본성)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각 취향이 스스로를 자연스럽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말 거의 그렇기 때문에 취향은 아비투스가 된다. 그리하여 다른 취향을 비자연적이며 따라서 타락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거부하게 된다.  미적 불관용은 가공할만한 폭력성을 갖고 있다. 다른 생활양식에 대한 혐오감은 각 계급을 갈라놓고 있는 가장 강력한 장벽이라고 할 수 있다.

화장품과 복장, 가정의 실내장식에 대한 태도 등 주관적으로 뿐 만아니라 객관적으로도 미적 성격을 갖는 입장은 사회 공간상의 위치나 고수해야할 서열 그리고 지켜나가야 할 거리를 실감하고 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당연히 사회의 여러 계급들은 동일한 성향을 갖고 있지 않으며 거부와 역거부로 이루어진 이러한 게임에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생활양식의 기본적인 성향을 미적 원리의 체계로, 객관적 차이를 선별적 차별화로, 수동적 선택을 의식적이며 선별적인 선택으로 변형시키려는 전략들이 실제로는 지배계급, 실로 최상층부의 부르주아지와 예술가들에게만 허용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2. 문화귀족의 혈통

학력자본의 수준이 동일하다면, 출신계급의 차이도 개인 능력의 여러 차이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학력자본이 차지하는 상대적 비중은 출신계급의 상대적 비중보다 훨씬 적게 나타난다. 즉, 출신계급비중이 더 크다는 것이다.

1) 매너와 문화의 획득방식

교육수준이나 출신계급과 같은 지수를 통해 포착되는, 또는 더 정확하게는 이들 간의 관계 구조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은 동시에 길들여진 아비투스의 다양한 생산양식이기도 한데, 이 양식은 획득된 능력뿐만 아니라 이들의 응용방식에서도 차이를 만들어내는 토대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방식상의 차이는 일련의 이차적인 속성, 즉 다양한 시장에서 아주 상이한 가치를 얻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속성을 구성하며, 상이한 획득조건을 드러내준다.

‘매너’가 상징적 의사표시이며, 그 의미와 가치는 생산자에게만큼 수용자에게도 의존한다는 것을 안다면 상징적 재화, 특히 탁월한 속성을 가진 재화를 사용하는 방식이 ‘계급’을 나타내는 핵심적인 지표 중의 하나이며, 그리고 그러한 차별화 전략의 이상적인 무기, 즉 프루스트의 말대로 하면 “거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동원되는 끊임없이 다양한 기법”을 구성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취향은 선천적으로 타고난다는 이데올로기는 두 가지 문화 능력과 사용방식을 대립시키며, 그리고 그 이면에서는 두 가지 문화 획득양식을 대립시킨다.

교육체계는 실제로 이러저러한 선호도를 얼핏 체계적으로 보이는 담론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고, 이를 통해 명확한 원리를 중심으로 의식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표현수단을 제공함으로써 취향의 실제적인 원리에 대한 상징적 지배를 가능하게 해준다. 이것은 마치 문법이 언어 능력을 합리화시켜 주듯이 ‘미적 감각’을 합리화시켜준다.

취향은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다는 이데올로기가 그럴 듯해 보이고 나름대로 효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일상의 계급투쟁에서 파생되는 모든 이데올로기 전략이 그렇듯이 실질적인 차이를 자연화하고, 본성화 하고, 문화 획득양식의 차이를 본성의 차이로 전환시키기 때문이다.

2) ‘학자’와 ‘사교가’

매너의 차이는 문화획득 양식상의 차이, 즉 지배계급에 도달한 시기의 격차를 가리키는데, 이 양식상의 차이는 일반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자본구조의 차이와 연결되어 있다. 마치 문화자본의 차이가 각 계급간의 차이를 나타내주듯이, 이러한 구조상의 차이는 지배계급 내부의 차이를 가리키는 경향이 있다.

모든 시대에 걸쳐 취향과 문화에 대한 논쟁의 핵심에 ‘학교적’이라는 말과 ‘사교적’, 즉 별로 힘들이지 않고 세련미를 과시한다는 말간의 대립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문화적 생산물을 생산 또는 평가하는 두 가지 방식은 동시에 두 가지 획득양식을, 그리고 적어도 근대세계에서는 교육체계와의 두 가지 상이한 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3) 경험과 학식

학식보다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가정 안에서의 교양 습득과 학교에서의 교양 습득을 실제적으로 대립시키기 때문이 이러한 편견을 갖게 된다.

부르주아지 문화와 부르주아지들이 문화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 감히 다른 계급이 흉내 낼 수 없는 성격을 갖는 이유는, 채 말을 배우기 전부터 교양이 몸에 밴 사람들, 교양을 갖춘 실천과 대상의 세계 속으로 잠겨들어야 비로소 획득가능하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약호code와 규칙, 따라서 학교제도와 비평과 연결될 수 있는 반면에, 자연 또는 ‘자연적인 것’의 편에 서 있는 쾌락주의자인 사교가는 느끼고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며, 예술적 체험으로부터 주지주의, 교훈주의, 현학주의의 모든 흔적을 배제하려 한다.

4) 태어난 세계

모든 물질적 유산은 동시에 문화적 유산이기도 하다. 가문의 유산은 시간이 흘러도 부단히 이어져 내려온 연속성과 불가분한 사회적 정체성을 성별할 뿐만 아니라 가계를 정신적으로 재생산하는 데도 실천적으로 기여한다.

획득양식의 효과는 가구, 의복, 요리처럼 일상생활에서 진행되는 통상적인 선택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이것들이 옛날부터의 뿌리 깊은 성향을 특히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이유는 교육체계가 개입할 수 있는 장의 바깥에 놓여 있는 이것들이 실제로 노골적인 취향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태어난 세계는 무엇보다 먼저 모친의 세계이지만, 그것은 또한 동시에 원초적 미각의 즐김과 최초의 먹을 것의 세계이자 원형적인 문화상품에 대한 원형적 관계의 세계이기 때문에 이것이 주는 기쁨은 완전한 기쁨의 유기적인 일부를 구성하고 이러한 즐거움을 통해 쾌락을 얻으려는 선택적 취향의 일부를 구성한다.

5) 상속 자본과 획득 자본

학력자본의 양은 같은데도 문화자본으로서는 각각 크기를 달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교육체계가 학위의 발행을 독점함으로써 상속자본의 학력 자본으로의 전환을 장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자본의 생산을 독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수년간 학습한 직접적 또는 간접적 효과는 실제로는 학위수여에 의해서 승인되지 않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사회적 궤적과 상속된 문화자본의 크기로부터 유래하는 차이들은 교육체계와 계급구조 간의 관계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반영하는 여러 차이들에 의해 재강화 된다.

  6) 두 개의 시장

가족과 학교가 기능하는 장소의 특징은 특정한 시간에 필요한 능력이 스스로 사용됨으로써 비로소 그러한 능력이 형성되고 그리고 이와 동시에 가치가 결정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즉 경우에 따라 상벌을 달리하면서 개인의 수행능력을 평가함으로써 허용될 수 있는 것에는 힘을 실어주고 허용 될 수 없는 것은 억제하면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성향을 제거해버리는 시장으로서 기능한다. 다시 말해 문화능력의 획득은 부지불식 중에 건전한 문화적 자기투자에 대한 ‘감각’을 획득하는 과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가족 또는 학교와 같은 각각의 사회 공간들이 능력이 생산되는 장소이자 가격이 결정되는 장소로 기능하는 이상, 각 장이 그 안에서 생산된 생산물에 가장 높은 가치를 부여하려고 한다.

7) 여러 요소와 힘

결국 분석의 어려움은, 분석도구 자체가 즉 교육수준과 출신계급에 대한 규정 자체가 현실 속에서는 분석대상인 예술과 예술작품에 대한 관계를 쟁점으로 하는 투쟁 자체 안에 포함되기 때문에 더욱 복잡해진다. 신계급이라는(단순하게 규정된) 두 개의 주요 변수와 관련된 통계상의 변화는 오직 각 변수가 정통 문화와 문화에 대한 정통적인 관계에 대한 적대적인 규정이나, 또는 더 정확하게는, 이러저러한 문화와 관련된 전형적인 특징에 상이한 가치가 부여되는 서로 다른 시장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제대로 상기할 때만 정확하게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요인들’ 중의 어느 하나에만 ‘효율성’을 부가하는 것은 전적으로 오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효율적일 수 있으며 따라서 다른 장 또는 동일한 장의 다른 상태로 이전되면 사라지거나 역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몸에 밴 아비투스를 구성하는 여러 성향은 특정한 장 안에서만, 자체가 ‘가능한 힘들의 장’인 여러 힘들이 특정한 성향과 관련해 드러나는 ‘역동적 상황’인 장과 관련될 때만이 형성되고 기능하며, 타당성을 얻을 수 있다.오직 특정한 장에서만 유효하게 작동할 수 있으며,따라서 각 장을 규정하고 있는 가격형성 메커니즘을 변형시키기 위한 투쟁에 따라 각 장에서 서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권력‘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면 몰라도 실증주의적인 방법론이 주장하는 대로‘독립변수’의 독립성을 믿기는 힘들 것이다.

 

Ⅲ. 논의의 비판적 분석

 

1. 부르디외의 문화와 취향 비판적 분석

세계적 석학 부르디외는 서구의 포스트모던 이론에서 보이는 과도한 담론 중심주의나 구조주의의 한계를 멀찍이 벗어나, 권력이나 사회계층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갖는지를 이론내재적으로 그리고 실증적으로 분석해낸다. 이 책 전체를 통해 부르디외는 항상 정치는 문화이며 문화는 정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매우 방대한 자료 분석을 동원해가며 입증해 보인다. 인간은 하루 24시간 중 잠자는 데 1/3, 일하는 데 1/3 그리고 나머지 활동에 1/3을 소비한다.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발견 중의 하나가 이 일하는 8시간의 메커니즘과 본질을 밝힌 마르크스의 노동이론이라고 한다면, 잠자는 1/3 시간 동안에 이루어지는 꿈 작업(dream work)이 인간의 깨어 있는 삶의 본질을 규정한다는 획기적 발견을 이루어낸 프로이트야말로 20세기의 가장 선구적인 예언자이자 과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나머지 1/3의 시간은, 사실 이 8시간이야말로 노동현장의 밖에서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부여받고, 또 꿈과 같은 무의식이 아닌 의식의 차원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감과 소속감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오늘날 유행어가 되어버린 "문화의 시대"라는 말은, 절대적인 빈곤 때문에 노동 이외에는 별달리 인간을 규정할 특징이 없었던 과거의 고단했던 시대를 벗어나 이제는 노동 이외의 시간이 점점 더 중요하게 부각되는 새로운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와 "관습"을 해명하기 위해 기호론적 분석이나 정신분석학적 접근 내지 의사소통적 접근 등의 다양한 접근 방법들이 제시되고 있으나 삐에르 부르디외의 이 책만큼 문화의 관습의 사회사를 경제사와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문화의 차별적 재장산과 교육의 사회학을 철저하게 추적하고 있는 책도 드물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문화만큼 계급에 따라 철저하게 차별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없다. 역설적으로 문화만큼 만인이 향수할 수 있고 만인에게 평등하게 분배된다는 소위 "문화적 공산주의"의 환상이 끈질기게 남아 있는 부분도 없다. 매우 난해한 고전음악이나 소위 "뽕짝"을 틀어놓고 몇 사람의 반응을 살펴보면 그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출신 계급과 사회적 궤적 전체를 추적할 수 있다. 예컨대 "고전" 음악의 경우, 어릴 적부터 늘 접해온 사람이라면 흥겨워할 것이고 그러한 세계를 전혀 접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몸을 비비 꼬며 당혹해하거나 짜증을 낼 것이다. 뽕짝의 경우라면 반대로, 강남의 노래방에서는 발을 붙이지 못하는 반면 시골에서는 언제나 히트송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여자들에게 자신이 나이보다 늙어 보인다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하면 강남 여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다고 대답하는 비율이 훨씬 높다. 따라서 "당신의 피부를 젊게 해주는 화장품"이라는 똑같은 문화상품에 대해서도 부르주아지 계층과 민중계급의 여성들의 반응은 완전히 상이하게 나타날 것이다. 민중계급의 여성은 그러한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반면, 소위 "잘사는 동네의 여성들"은 '자연스런 피부'와 같은 자연의 신화를 추구한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양반문화"와 "상놈문화"가 현대에 들어와서 한층 세밀하고 정교하게 그대로 생산/재생산되고 있으며 문화와 취향 그리고 교육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준다는 통념과는 달리) 인간을 차별적으로 구별하고 격리하고 배제하고 설득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2. 부르디외의 문화귀족의 혈통의 자본 개념 비판적 분석

부르디외는 ‘자본’ 개념을 ‘축적된 역사로 요약한다. 마르크스에게 자본이란 축적된 노동으로서의 가치고, 동시에 순환하고 자기 증식하는 가치다. 부르디외는 마르크스적 자본 개념을 경제재로서만이 아닌 교육재, 문화재, 사회재, 정치재 등으로 자유롭게 확장한다. 부르디외는 이렇듯 응용 확장한 자본을 통칭하여 상징적 자본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사회적, 정치적, 국가적, 문화적, 정보적, 학술적 자본 등이 포함된다. 그는 이렇듯 자본 개념을 경제 영역만이 아닌 범사회적 영역으로 확대함으로서 “실천의 경제에 관한 일반 과학"를 구축하려는 이론적 야심을 가지고 있다. “실천의 경제”, “일반 과학”이라는 용어는 부르디외 ‘자본’ 개념의 포괄성, 전일성, 일원성을 예고해 준다.

부모 세대의 교육적, 문화적 자원이 계급 재생산에 긴밀히 접합되어 있다는 주장을 펼친 부르디외의 연구들은 잘 알려져 있다. 이렇듯 부모세대에서 자식세대로 전이되는 문화, 교양, 취향의 자산을 그는 문화적 자본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자본’은 사적-배타적으로 축적되고 전승되며 증식하는 역사적 실체이다. 문화영역으로 확장하였지만, 개념의 골간에는 마르크스주의적인 계급적 함의가 남아 있다. 동시에 그의 자본 개념은 마르크스의 자본처럼 이윤추구, 이윤 증식 적이다. 부르디외는 자본 개념을 상징적 영역으로 확장시킴으로서 원래의 경제적 자본 개념이 갖는 이윤추구, 이윤증식의 성격을 상징적 차원의 이해추구로까지 확장시켰다.

그의 사회적 자본 개념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사회적 자본이란 현실적 또는 잠재적 자원의 집합으로서의 상호 면식과 인식이 제도화되고 지속화된 관계망을 소유하는 것--즉 특정 집단에의 멤버십--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한 제도화된 관계망은 집단적으로 소유된 자본의 후원, 즉 신용을 부여해주는 보증을 소속원에게 제공한다”. 그의 문화적 자본 개념이 주로 부모와 그 부모의 관계망이 갖고 있는 문화적 자원이 자식 세대로 전승되어 가는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면, 사회적 자본은 보다 포괄적인 사회관계 속에서 각 개인이 갖고 있는 연결망과 집단소속이 해당 당사자에게 주는 다양한 사회적 기회 자원을 총칭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듯 광범한 사회 영역에서 비영리적, 공공적 동기를 가지고 맺어지는 사회적 관계망 역시 사회적 자본의 범주에 속한다. 부르디외의 사회적 자본 개념은 이러한 비영리적이고 공공적인 사회적 관계망이 가진 특성을 적절하게 설명해 주지 못한다.

 

3. 브루디외의 미적 보편성 간과 비판

학력자본 또는 출신계급과 이러저러한 유형의 지식 또는 적용방식 간의 통계적 관계의 이면에는, 문화자본의 획득정도와 이 자본을 갖고 문화시장에서 가장 많은 이윤을 뽑아낼 수 있는 조건에 따라 문화에 대한 서로 다른, 심지어 상호 적대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여러 집단들 간의 관계가 은폐되어 있다. 문화게임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이 게임의 진정한 본성을 객관화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이러한 객관화를 달성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용하도록 강요되는 절차를 가능하면 완벽하게 객관화하는 방법뿐이다. 문화게임은 언제나 이 게임에 참가하고 있는 행위자들이 부분적인 객관화를 수행하기 때문에 객관화에 저항한다. 그러나 그러한 객관화는 항상 부분적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객관화하는 관점을 포함시키지 않는 한 언제나 잘못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게임을 전체적으로 구성하는 데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오직 여러 위치들의 장 전체의 수준에서만 이 게임에 참여하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는 생성적 이해관심과 다양한 위치에 부가되는 특수한 이해관심 모두를 파악할 수 있다.

이 연구를 통해 두 가지 기본적인 사실이 확인되었다. 먼저 다양한 문화 실천과 학력자본, 그리고 이차적으로 출신계급 간에는 극히 밀접한 연관관계가 존재한다. 둘째 학력자본의 수준이 동일한 경우 최고로 정통적인 문화 영역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실천이나 선호의 설명체계에서 출신계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하게 된다는 점이 그것이다.

부르디외는 학력 수준과 사유 재산에 따라 취향이 나눠진다고 보고 있지만 누구나 보편적으로 가지는 미적 취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부르디외는 인간의 미적 성향에 대해 개인의 차이성에 주목하였지만 누구나 가지고 있는 미적 보편성에 대해 간과했다고 생각한다.

 

Ⅳ. 맺는말(느낀점)

 

이 책을 읽기 위해 나는 많은 시간을 투자하였으나. 이 과제물을 쓰는 이 시점에서도 정말로 내가 이해하여 요약하고 그의 논의를 제대로 분석하였는지 의문이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대중들의 입장과 그 대중들 사이에서 학력과 경제력, 가정환경에 따른 변화무쌍한 사회적 관계는 단순히 이 책을 읽었다고 하여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판단하는 여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본래 이 책의 저자인 부르디외라는 프랑스 대표적인 교육기관의 사회학 교수를 지낸 사람으로 과거 1968년 5월 혁명에 대하여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브르디외는 모든 것이,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다고 하여 완벽한 부르주아에 의해 자본력만이 상위계급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자본 중에서 경제적 자본은 있어도 그 외의 자본은 없었다. 그것은 문화적 자본이다. 문화자본은 학력, 지역, 취미, 식생활 등 다양한 요소들이 집중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이 문화를 생산하는 것에서 문화가 인간을 생산을 하고 재분류를 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브르디외가 보기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예술 감상에서부터 속옷을 고르고 음식을 먹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계급적 '구별'과 무관하지 않다. 요컨대 모든 문화 행위나 취향, 안목 등은 교육 수준 및 출신 계급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브르디외가 이 책에서 밝혀내고자 하는 것은 이처럼 총체적인 불평등 분배 구조와 재생산, 그것을 정당화하는 권력 메커니즘을 지닌 자본주의 사회 그 자체이다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고, 고급스러운 칵테일 바에서 술 먹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과 신나는 댄스 음악이나 트로트를 즐겨 듣고, 포장마차에서 술 마시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취향을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어떤 것이 아니라 행위자들이 스스로의 경험과 생활 속에서 획득한 후천적 성향으로 본다. 취향은 "구분하고 평가하는 획득한 성향"이며 "계급의 표시자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 사회의 각기 다양한 계층과 계급, 집단들은 각기 다양한 취향과 습관을 통해서 다른 계층과 계급, 집단들과 차별화된 모습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적극적으로 그러한 차별화를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점이다.

 

 

참 고 문 헌

 

삐에르 부르디(2005), 「구별짓기」상권, 새물결.

클리포드 기어츠(2009), 「문화의 해석」, 까치글방.

허연(2002), 허연의 역사속 명사산책 삐에르 브르디에 구별짓기.

홍성민(2012), 취향의 정치학 :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읽기와 쓰기, 서울: 현암사.

http://blog.never.com/maring87/40040749247

http://chloe80.egloos.com/876848

http://www.sgsgi.com/sgsg/c/read.jsp?serial=19&seq=736&item=12&page_no=11

www.complexity.or.kr/doc/01/CPFileV.html?seq=34&fbn=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