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혈단포 총구,방아쇠,노리쇠가 두 개씩인 쌍혈 단총으로 개화기 이전 중국으로부터 들어와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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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기 해방 전후에 유행했던 SP축음기와 판이다. 손잡이로 태엽을 감고 바늘을 판 위에 올리면 바늘 위쪽에 있는 소리통이 울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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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화점 1920년대 잡화접의 모습으로 갓신,나막신,짚신,가위,안경집 등 온갖 물품을 진열해 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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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조선의 아이들 무명 저고리 치마에 쪽찐 머리를 하고 이방인을 바라보는 눈이 마냥 선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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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남대문 옆 길 경성 남대문 옆 길로 흰 옷 입고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고 수레,전봇대,건물 등에는 일제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역력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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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1920년대의 서울 앞 쪽에는 신식 건물들이 즐비하고 뒤 쪽으로 낮은 건물들 사이로 넓은 도로 끝에 조선침략의 본거지인 총독부 건물만이 눈에 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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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평양 시장 평양의 어느 시장 안 풍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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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독립문 우뚝 선 독립문 옆으로 전철이 지나가고 제염공장에서 검은 연기가 솟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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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수원 화성 팔달문 화성(華城)은 정조(正祖) 20년(1796)에 완성된 성으로 정조 임금의 효심과 개혁의 뜻이 담긴 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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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과 용연(龍淵) 동북각루(東北角樓)인 방화수류정과 그 아래 연못 위에 솟아오른 바위는 광교산의 일맥이 용 머리가 되어 솟은 것이라고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서는 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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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홍문(華弘門) 광교산에서 흐르는 개천이 성내를 관통하는 곳에 북수문과 남수문을 설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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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지지대(遲遲臺) 정조(正祖)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잠들어 있는 현륭원(顯隆園)을 바라보며 더딘 발길을 재촉하던 이 긴 고개가 지지대 고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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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신사(水原神社) 일제 식민지 치하 조선 말살 정책의 하나로 일본 황실과 그 공로자들 추모하는 곳으로 전국 곳곳에 세워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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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월보 1910년 8월 15일부터 1937년 5월까지 발행했던 천도교의 월간 기관지이다. 창간호부터 한글로 글을 싣고 있는 이 월보는 민중을 계몽하고 교양을 보급하려는 뜻을 담고 있으며, 천도교 사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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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지방법원수원지청 일제 식민지 치하 조선인을 탄압하기 위해 설치한 재판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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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창룡문(華城蒼龍門) 현재는 다시 복원되었지만 이 엽서 사진은 6.25 동란 중 소실되기 이전의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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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화서문(華城華西門) 사진처럼 예전에는 넓은 들판을 가로지르며 가파른 팔달산으로 오르는 성벽과 연결되어 있는 서쪽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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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연무대(華城鍊武臺)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성내를 조망할 수 있는 등성이에 건물과 조련장을 마련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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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역 1930년대 조선 풍물 안내첩에서 수원역을 소개하는 사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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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공희보(立功喜報) 이 증서는 1951년 8월 31일 한국전쟁 중, 중국 조선 철로 군사 관리국에서, 중국 요서성 철도현 형국동(邢國棟)에게 항미원조(抗美援朝), 즉 6.25 사변 중에 북한을 도운 공로로 표창한 증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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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신문 1898년 8월10일 창간되어 1910년 8월2일 폐간된 신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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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기념 스테레오 뷰 사진 1900년초 언더우드가 찍은 선교 기념 사진으로 당시 개화에 앞장 선 흰 옷 입은 아이들과 갓을 쓴 어른들이 선교회 서양 여인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은 특수한 기계로 보면 입체로 볼 수 있는 사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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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田愚) 선생 초상 조선 시대의 마지막 정통 유학자이신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 선생의 초상 사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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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억 선생의 탑골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 답사 사진 1904년 남궁억 선생이 잡초에 덮인 탑골 원각사터에서 우산을 들고 대원각사비를 바라보고 있는 스테레오뷰 사진이다. 구한말에 잠시 제작된 이 스테레오뷰 사진은 특수한 장치로 보면 입체로 볼 수 있도록 만든 사진이다. 뒤쪽에 당시 군악대 건물인 듯한 건축물과 한옥들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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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역의 고민(弑逆의 苦憫) 1955년 학예사에서 펴낸 안두희(安斗熙)의 수기이다. l949년6월26일 12시45분.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의 흉탄은 아직도 이 나라 민족정기의 암울한 그늘로 우리 민족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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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가의 아이들 스테레오뷰 사진 1904년 외국인의 눈에 비친 서울 근교 냇가 풍경 사진이다. 흰 저고리의 아이들과 멀리 창틀의 종이를 씻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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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가의 아이들 스테레오뷰 사진 1904년 외국인의 눈에 비친 서울 근교 냇가 풍경 사진이다. 흰 저고리의 아이들과 멀리 창틀의 종이를 씻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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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전기 난로와 스토브 일제 식민지 시대 사용되었던 전기 난로와 스토브이다.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가 사용했던 전기 도구들로 추정되며 일본에서 제작된 것이다. 디자인이 독특하고 정교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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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가는 농부 스트레오뷰 사진 1901년 '흰 옷 입은 한국의 농부'라는 제목으로 미국 Keystone 사에서 제작한 사진이다. 흰 바지 저고리에 상투를 틀고 쟁기로 밭을 가는 우리의 친구 황소, 이렇게 천년을 살아왔던 것인데 근대화의 한 순간, 과거로부터의 시간과 공간을 이어 오던 그 삶의 모습 모든 것이 인간의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져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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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의 칼 두꺼운 가죽띠에 아직도 퍼렇게 살아있는 무명의 외침이 들리는 듯 하다. 창의병(倡義兵)은 이름없는 사람들의 투혼으로 이렇게 흔적만 전해질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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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중 포격 사진 기와집이 보이는 뒷밭에서 7명의 UN병사들이 방금 포를 발사하고 귀를 막고 있는 6.25 전쟁의 생생한 장면이다. 당시 20대의 젊은이들, 지금 살아있다면 70대의 노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 사진은 43×35㎝의 대형 원판 사진으로 미국 ebay사로부터 구입한 사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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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 1899년 4월 5일자 1898년(광무 2) 9월 5일에 창간된 일간신문으로 남궁 억(南宮檍),나수연(羅壽淵),장지연(張志淵),박은식(朴殷植),유근(柳瑾) 등이 주 2회간이던 《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인수하여 《황성신문》으로 개제하고 일간신문으로 창간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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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의 외출- 스테레오 뷰 사진 1904년 가마를 타고 외출을 하는 양반 댁 마님을 외국인이 촬영한 스테레오 뷰 사진이다. 갓을 쓰고 수염을 기르고 흰 바지 저고리에 짚신을 신은 하인의 모습과 부인의 표정이 이채롭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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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가 기념 사진첩(李王家記念寫眞帖) 1919년 일본 동경 반도신문사(東京半島新聞社)에서 발행한 조선 이왕가 기념 사진첩이다. 서언(敍言)에서 태조와 세종의 큰 덕을 칭송하고, 고종황제가 동양대세에 의해 일한합병한 후 훙거하여 유감이라 하고, 약력과 장례 광경을 부록으로 수록하고 있다. 위 자료는 목차에 나오는 사진으로 태조대왕 단(旦=이성계)과 고종황제 희(熙), 이왕전하 척과 이왕세자전하 은(垠)의 약력을 기록한 뒤 사진을 싣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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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전 근위병의 스테레오뷰 사진 1903년 미국 그레이브가 찍은 근정전의 청동 향로와 근위병의 모습이다. 외세의 눈에 비친 망국의 현장으로 바닥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화면에는 시름이 가득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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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훈련대 구한말 대한제국 훈련대 병사들의 집총 훈련 광경 사진으로 미국 언더우드사에서 제작한 스테레오뷰 사진이다. 궁궐안에 자리한 시위대(侍衛隊) 병사들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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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4년부터 국권피탈 때까지 발간되었던 일간신문이다. 1904년 2월에 일어난 노일전쟁(露日戰爭)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던 영국인 배설(裵說:Ernest Thomas Bethell)이 양기탁(梁起鐸)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7월 18일에 창간하였다.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던 무렵은 일본측이 한국 언론에 대해 검열을 실시하고 직접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주한 일본 헌병사령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민족진영의 대변자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사세(社勢)가 확장되고 독자수도 늘어나면서,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된 이후에는 민족진영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적인 언론기관이 되었다.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版) 6페이지로서 그 중에서 2페이지가 한글전용이었고, 4페이지는 영문판이었다. 창간 다음해인 1905년 8월 11일부터는 영문판과 국한문신문을 따로 분리하여 두 가지 신문을 발간하였다. 영문판의 제호는 《The Korea Daily News》였고, 창간 당시는 순한글로 만들었던 국문판은 국한문을 혼용하여 발간하였다. 그러나 국한문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글전용 신문의 필요성을 다시 느끼게 되어 1907년 5월 23일부터는 따로 한글판을 창간하여 대한매일신보사(社)는 국한문 ·한글 ·영문판 3종의 신문을 발행하였으며, 발행부수도 세 신문을 합쳐 1만 부를 넘어 당시로서는 최대의 신문이 되었다. 논설진으로는 양기탁 외에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이 큰 영향력을 가진 신문이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자 일제는 이 신문에 대해 여러 가지 탄압을 가하게 되었다. 일본측은 외교경로를 통해 소송을 제기하여 발행인 배설은 1907년과 1908년 2차례에 걸쳐 재판에 회부되었고, 양기탁도 국채보상의연금(國債報償義捐金)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배설은 이러한 탄압과 싸우는 가운데 1908년 5월 27일부터 발행인 명의를 영국인 만함(萬咸:Alfred Marnham)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1909년 5월 1일 배설이 죽고 난 후, 1910년 6월 1일부터는 발행인이 이장훈(李章薰)으로 바뀌었고, 국권 피탈이 되면서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했다. |
태백산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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