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차밭에 서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할 자격이 없다구? 층층이 펼쳐진 차나무 고랑을 그림처럼 담은 CF와 드라마들, 그리고 먼저 다녀온 사람들의 극찬은 우리를 보성으로 이끌었다. 전라남도, 하고도 남쪽 끝인 보성은 아무리 일정을 밭게 잡아도 밤차를 타고 새벽에 도착해야 하는 무박2일의 여행지였지만, 3시간 안에 광주까지 내려가는 고속철도를 이용해 보성 옆 율포해수욕장까지 둘러보는 당일 여행 코스를 짤 수 있었다. 두근두근!
지하철 패스의 확대판처럼 생긴 KTX 티켓을, 역시 지하철 매표구처럼 생긴 개찰기에 넣으면서 여행의 흥분은 본격 시작되었다. 영수증으로 필요하거나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은 사람들을 배려해 역무원에게 티켓을 보이고 통과하는 라인도 있었다. 좌석은 덩치 큰 남자들이 앉으면 약간 불편하겠다 싶을 정도로 절반은 열차 진행 방향과 같은 순방향, 절반은 거꾸로 앉아서 가는 역방향으로 배치돼 있다. 역방향 자리는 요금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그 밖에 차량 사이의 공간에 화장실과 더불어 큰 짐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과 간단한 과자를 뽑아 먹을 수 있는 스낵 자판기가 배치된 점이 특이했다.
통로 중간중간에 설치된 모니터로 <노브레인 서바이버>를 보며 즐겁게 여행 중이다. 잠을 자거나 다른 일을 하는 승객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볼륨을 많이 낮춰놓아 약간 답답했다. 팔걸이에 부착된 단자에 이어폰을 꽂는 방송 시스템과 비행기 기내 수준의 음료 및 신문 서비스는 특실에만 제공된다고. 일반실에는 보통 열차에서 만나던 홍익회 매점 카트가 똑같이 지나간다. 특실은 좌석이 더 넓고 회전도 되지만 요금이 40%나 더 비싸단다. 열차가 수도권을 벗어나며 조금씩 속도가 붙는 게 느껴졌지만 전용 선로 비율이 낮은 호남선이라 그런지, 예상만큼 체감 속도가 빠르지는 않다.
광주역에 내려서 시외버스로 갈아탔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집에서 준비해온 샌드위치로 점심 식사. 광역시이긴 하지만 서울을 벗어나니 한결 한적하고 여유로운 분위기인 데다, 버스 차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점점 시골로 변해간다. 한 시간 반 정도를 버스에서 졸다가, 대한다원 앞에 내렸다.
차밭도 차밭이지만, 대한다원은 진입로의 운치 있는 메타세콰이어 길로도 유명하다. 찌를 듯이 솟은 삼나무 사이로 걸으며 심호흡을 하니 미니 삼림욕을 체험하는 듯 평온해지는 기분. 나무와 꽃들을 즐기며 10분 정도 걸어들어가면 드디어 차밭이 눈앞에 펼쳐진다. 시야를 가득 채울 정도로 제법 경사진 언덕배기까지 일렬로 늘어선 차나무 고랑 가로줄이 층층 겹쳐진 광경은 광고나 드라마를 통해 익숙하다고 해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 가파른 차밭을 걸어오르며 사진을 찍다 보니 땀이 슴슴 배어나온다. 내려오는 길에 시음장의 녹차와 1천원짜리 녹차아이스크림으로 갈증을 달래고, 아버지께 갖다드릴 1만8천원짜리 중작 녹차도 구입했다.
차밭 근처의 율포 바닷가는, 여름철 해수욕보다 해수녹차탕에서 온천을 즐기러 오는 사람들이 많은 곳. 벌써 초여름 기온까지 올라 더운 오늘은 온천욕을 생략하고, 바다를 보며 바람을 쐬기로 했다. 서해안 특유의 뻘밭이라 동해 같은 맑은 물의 감흥은 없지만, 아기자기한 어촌 풍경을 구경하는 나름의 재미가 있다. 바다를 향해 길게 뻗은 방파제를 걸으며 넓게 펼쳐진 바다 앞에서 심호흡을 하니 답답했던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
보성에 위치한 조그만 절 쌍봉사는 여행 가이드북에 절대 안 나오는 숨겨진 명소! 규모는 작으면서 3층으로 높이 올라간 대웅전,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절집과 종각, 연못은 우리나라 절 같지 않은 이국적인 인상이다. 크고 화려한 사찰들처럼 현대적으로 복구해놓지 않아 낡고 바랜 세월의 흔적들이 오히려 멋지다. 대중교통이 다니지 않기 때문에 택시를 이용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저녁 퇴근 시간에 맞물려 약간 더 시간이 소요되었다. 현지의 기사아저씨께 맛집을 물어 유명하다는 식당에서 떡갈비와 비빔밥을 맛본 후, 여유있게 9시 45분에 광주역을 출발하는 KTX에 승차. 이번에는 차내 방송으로 <엑스맨>을 틀어주었지만 피곤한 하루를 보낸 후라 거의 깨지 않고 서울역까지 왔다. 자정을 넘긴 12시 40분경 도착. 돌아온 도시는 어둠침침하지만, 우리는 찻잎의 초록빛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이보다 더 알차게 하루를 보내는 방법? 당분간은 떠오르지 않을 것 같다.
1. 미리 예매한 승차권은 자동 발매기에서 뽑는다. 2. 여기가 바로 보성 대한 다원 3. 대한 다원 진입로에는 심나무들이 시원하게 뻗어있다. 4. 구릉지대를 덮고 있는 초록의 아름다운 차밭. 5. 전라도 음식은 역시 최고, 광주에서 맛본 비빔밥과 떡갈비.
6. 탁 트인 방파제에서 시원한 바람도 쐬고 7. 해수 녹차탕으로 유명한 율포 해수욕장 8. 개찰구는 마치 지하철 같은 구조.
부산(am 7:00 ~ pm 10:00) 오전 7시 서울역 고속철 탑승 - 부산 태종대 바닷가 - 남포동 시내 - 용두산공원 - 오륙도 유람선 관광 - 오후 7시 부산역 출발 담양(am 7:35 ~ pm 9:00) 오전 7시 35분 용산역 고속철 탑승 - 광주역 도착, 시외버스로 담양 이동 - 대나무박물관 - 대나무 테마공원 - 메타세콰이어 숲 - 소쇄원과 가사문학관 - 오후 6시 광주역 출발 경주(am 7:00 ~ pm 12:00) 서울역 고속철 탑승 - 동대구역 하차 - 경주 양동 민속마을 - 문무왕릉 - 감은사지 - 불국사 - 동대구역 출발 고창(am 7:20 ~ pm 8:00) 서울역 고속철 탑승 - 익산역 하차 - 고창 선운사 - 부안 내소사 - 변산반도, 채석강 - 익산역 출발
- 고속철도의 순간 최고 속도는 시속 300km. 참고로 지하철의 최고 속도가 80km, 무궁화호 열차는 120km, 새마을호가 140km다. 초속으로 환산하면 83m/s로, 60m/s를 기록한 태풍 매미의 풍속보다 빠른 셈.
- 산이 많은 우리나라의 지리적 특성상, 고속철도는 아주 많은 터널을 통과한다. 터널 속으로 들어갈 때와 밖으로 나올 때 광량의 변화가 극심하니 낮 시간에 여행하며 창밖 풍경을 구경하고 싶다면 선글라스를 끼는 편이 눈에 부담을 덜 줄 듯.
- 흡연자들에게 미안하지만 열차 안 화장실, 객차 사이, 승강장과 대합실 모두 절대 금연! 다만 열차 내에서 음주를 금지하는 규정은 없으며 이동 매점 카트에서 맥주를 판매하기도 한다. 하지만 KTX 안에서 알딸딸 해진다면, 술이 깨기도 전에 목적지에 도착해서 곤란해지지 않을까?
- 보다 저렴하게 여행하고 싶다면 자유석을 추천. 좌석 번호가 지정되지 않는 자유석 표를 끊으면 3%가 할인 된 요금으로 조금 싸게 KTX를 이용할 수 있다. 17, 18호 두 칸의 차량을 자유석으로 운영 중. 승차권에 표시된 출발시각 전후 1시간 이내에 출발하는 모든 KTX의 자유석을 이용할 수 있다. 오전 9시 출발로 표시된 자유석 승차권을 구입하면 오전 8시~10시 사이에 출발하는 모든 KTX 차량의 자유석에 탈 수 있는 것. 승차 이후에 좌석을 지정받고 싶다면 승무원에게 요청한 다음 차액을 지급하면 된다. 출발시각보다 1시간 정도 일찍 역에 도착하거나, 출발시각을 놓쳐 늦게 도착하더라도 승차권을 변경 발매하는 절차 없이 탈 수 있다는 것이 장점. 지정 승차권을 변경할 경우 운임의 3%, 반환할 때 30%인 수수료를 절약할 수 있다. 자유석 승차권을 반환할 때는 지정된 열차 출발 전에는 운임의 3%, 지정된 열차가 출발 후 도착역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10%의 수수료를 뗀다.
- 출퇴근이나 통학 목적으로 고속철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60%까지 할인되는 정기승차권 구입이 필수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어른 일반 운임은 4만5천원인데, 6개월간 40회 사용할 수 있는 정기 승차권을 구입하고 주중에 이용하면 최대 30% 할인 혜택을 받는다. 정기승차권을 끊어도 자유석에 승차한다. 잃어버렸을 때는 7백원의 재발급 수수료를 내면 남은 기간 및 횟수에 대해 다시 발급해준다